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바스 왕조 (문단 편집) === 문학 === [[파일:Vasnetsov_samolet.jpg]] 하늘을 나는 [[양탄자]]. [[천일야화]]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장면이다. '''[[천일야화]]의 배경이 아바스 왕조 시대다.''' 아마 이슬람 세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가장 유명한 이슬람 소설집으로 꼽히는 [[천일야화]]는 인도에서 모티브를 따온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일화 모음집을 [[바그다드]]의 아랍인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각색하고 번역하면서 만들어졌다. 훗날 아랍,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심지어 이집트까지 천일야화의 방대한 세계관 속에 통합되었고, 10세기 경에 구체화되기 시작하더니 14세기에 이르러서야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최종본의 형태가 등장했다. 주요 줄거리는 [[페르시아]]의 한 왕이 여인들과 결혼한 다음 매일 밤마다 죽여대는데, [[세헤라자드]]라는 지혜로운 여인이 하룻밤마다 한 가지씩 이야기를 들려주며 왕을 궁금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무려 천하루의 밤을 살아남아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아는 [[알라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신드바드]]의 모험 등이 바로 여기서 나왔다.[* 서구권에 천일야화가 처음 전파된 건 18세기 경이다. 이후 [[오리엔탈리즘]]과 맞물려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지는 등 현재는 명실상부 이슬람과 아랍권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들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노골적인 연애 이야기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로맨스 이야기가 바로 이슬람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리는 '라일라와 마즈눈'의 이야기다. 옛날옛적 라일라와 카이스라는 두 연인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소꿉친구여서 어딜 가나 손을 꼭 잡고 다녔고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쟤네 연애하나봐' 이러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라일라의 아버지는 대로했다. 그는 일부러 카이스의 접근을 금지했고, 라일라를 저멀리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버렸다. 카이스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렸으며 '미친놈'이란 뜻의 '마즈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한편 라일라는 카이스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못하고 외로워하다 병이 들어 죽어버렸고, 이 소식을 들은 마즈눈은 황량한 들판으로 나가 살며 라일라의 무덤 앞에서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마즈눈을 말리려 했지만 그 주위에 맹수들이 으르렁거려서 다가갈 수도 없었다. 결국 마즈눈은 사랑을 지키며 혼자 굶어죽었다는 새드엔딩이다. >유리에 퍼지면 무수한 색을 자랑하여 모든 혀들을 잠잠케 하고 > >연인의 부탁에 아름답게 말을 건네는 나긋나긋한 청년의 손에 재단사와 같은 튼실한 금빛 몸매를 과시하며, > >관자놀이에는 곱슬머리가 물결치고 재앙을 불러오는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면 > >그는 그리스도인일지어니, 그는 호라산에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윗가슴과 목을 훤히 드러내고 다니나니 > >당신이 이 고상한 아름다움에 말을 건다면, 아마 이슬람 교리조차 높은 산꼭대기에서 당장 던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어다 > >모든 죄인을 범죄케 하는 그의 약탈을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 >나는 그의 종교로 개종하여 알면서도 사랑으로 그 종교에 들어갈 것이었을지라, > >만약 그가 참된 교리를 믿고 있지 않았다면 알라께서 이 젊은이를 이토록 아름답게 구별하지 않으셨을 것이라 착각했을 터이니 > > > - 아부 누와스의 시.[* 이 시는 아부 누와스의 대표작으로서 그의 시관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들 중 하나로 꼽힌다. 읽어보면 대충 알겠지만 [[소년애]] 성향이 대놓고 드러난게 특징이며,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예찬, 심지어 [[이슬람교]]에 대한 풍자마저도 섞여 있다. 술과 쾌락을 좋아했던 아부 누와스는 동성애와 술을 혐오하는 무슬림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성향의 시들을 많이 남겼다.] 아랍 시는 큰 발전을 이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바스 왕조의 최전성기보다는 오히려 아바스 왕조의 분열기와 혼란기 시대에 걸쳐서 황금기를 누렸는데 이같은 전성기는 [[페르시아]] 통일 제국들이 등장할 때까지 쭉 이어진다.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해짐에 따라 반대로 예술은 발전했던 것. 아바스 왕조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시인은 9세기 경 칼리파의 지원을 받아 활동한 '아부 탐맘'과 '아부 누와스'가 있다. 아부 탐맘은 아랍 역사상 최고의 선집으로 일컬어지는 10권의 시집 '하마사'를 발표했고,[* 그는 폭설로 [[하마단]]에 갇혔을 당시 그 곳에 있는 대도서관에서 장서들을 추려내 하마사를 저술했다.] 아부 누와스는 천일야화에도 등장할 정도로 위대한 시인들 중 하나였다. 놀라운 점은 아부 누와스가 에로틱한 시들, 심지어 [[동성애]]를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시를 남겼다는 점이다. 그는 [[이슬람]] 자체를 조롱하며 대담하고 재치있는 시들을 500여 편 넘게 썼는데, 당시 사회상 자체가 대단히 자유로운 편이었을 뿐더러 동성애 코드도 드문 것이 아니었기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하룬 알 라시드]] 치하의 바그다드는 수많은 서점과 책방들로 유명했다. 751년 [[탈라스 전투]]로 인해 중국에서 제지술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탈라스 전투에서 사로잡힌 [[당나라]] 군대 포로들 가운데에 제지술을 아는 자가 있었고, 이 기술을 높이 평가한 칼리파는 [[사마르칸트]]에 이 기술자를 머무르게 해 아랍 최초의 제지소를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이는 싸고 가벼운 장점 덕에 양피나 가죽을 제치고 대표적인 기록 매체로 자리했고, 책 생산량은 폭증했다. 단순히 책의 발행량의 늘어난 것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일반인들에게도 종이가 전파되며 사업, 문학, 은행업 등 수많은 분야에 쓰이기 시작했고 사회 전반 자체가 뒤집혔던 것이다. 거의 서구 유럽의 인쇄 혁명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 덕분에 바그다드는 수많은 서적들과 종이더미로 넘쳐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